317일: 백남기 농민이 죽음에 이른 시간
2015년 11월14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청 네거리를 가로막은 경찰차벽 위에서 쏘아진 물대포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사람이 맞아 쓰러졌다. 전남 보성군에서 온 백남기(69) 농민이었다. 뒤로 넘어간 농민의 몸 위로 물대포 사격이 20초 가량 계속돼 물보라가 일었다. 아스팔트에 최루액과 피가 흘렀다. 주위 사람들이 간신히 그의 몸을 끌어내 지나가던 구급차에 실어 보냈다. 백남기 농민을 맞은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그가 외부 충격으로 인해 뇌출혈을 일으켰다고 진단했다. 가족들은 의료진으로부터 “(뇌)출혈이 심해서 수술 자체가 불가하다”며 “아버님 못 돌아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백선하 서울대병원 교수가 뇌수술을 제안, 감행했다. 효과는 없었다. 의식을 찾지 못하는 몸은 호흡도 체온도 스스로 조절하지 못했다. 심장만이 간신히 스스로 뛰었다. 아무도 소생 가능성을 말하지 못하는 연명치료만 이어졌다. 몸은 급속히 무너져갔다. 건강했던 폐에 물이 차고 췌장이 약해져 당뇨가 왔다. 장이 마비됐다. 가족들은 “그냥 고통 속에 있는 아버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농민, 시민단체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며 서울대병원 앞에서 무기한 천막농성을 벌였다.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2016년 9월25일 오후 2시 백남기 농민은 결국 영면했다. 쓰러진 지 317일 만이었다. 칠순 생일 다음날이었다.

202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날, 경찰 살수차가 사용한 물
11월14일 경찰은 최근 10년 이래 최대 경찰병력, 최장시간 최대량의 물대포 사용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차벽트럭 20대와 경찰버스 679대, 경찰병력 2만명이 배치돼 광화문 일대를 포위했다. 이날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를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전국 19대 살수차가 총동원됐고 이중 10대를 사용해 오후 4시55분부터 밤 11시10분까지 6시간 동안 물대포를 쏘았다. 시민들에게 쏘아진 물의 양은 202톤에 달했다. 최루액 440리터(pava, 합성 캡사이신)와 색소 120리터가 섞여 있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물질안전자료(MSDS)를 근거로 피부 염증과 심하면 사망까지 초래하는, 인체에 사용해서는 안 될 위험물질이라고 주장했다.
충남살수09호는 저녁 6시50분부터 7시30분까지 40여분간 종로구청 네거리 앞에서만 물 4천리터를 시민들에게 쏘았다.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직사直射한 횟수는 일곱 번이다. 그중 네 번째 직사 살수가 백남기 농민의 얼굴을 가격했다.
경찰은 직사 살수시 2500~2800RPM의 수압을 유지했다고 밝혔다. 인권, 법률단체로 구성된 ‘민중총궐기 국가폭력조사단’은 “2500RPM은 류현진 선수가 시속 160km로 야구공을 던질 때의 압력”이라고 밝혔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제작진 실험 결과 2800RPM의 물줄기는 1.2톤짜리 벽돌탑을 무너뜨리고 벽돌까지 깨뜨렸다.
경찰의 물대포 사용은 타당했을까. 인권단체들은 물대포 사용 자체가 위법, 위헌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살수차 사용에 관한 법적 근거와 구체적 기준이 법률이 아닌 경찰 내부지침으로만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상 살수차는 ‘위해성 경찰장비’로 분류된다. 위해성 장비의 사용기준은 ‘필요한 최소한도로 해야 한다’고만 되어 있다. 살수차의 구체적 운용규정은 경찰 내부지침인 ‘살수차 운용지침’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용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2009년 국가인권위는 경찰에 살수차의 구체적 사용기준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살수차 운용지침’을 법적 근거로 보기엔 부족하고 경찰의 자의적 운용가능성을 우려해서다. 경찰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측은 불법집회 대응을 위한 적법한 직무행위라고 주장했다. 백남기 농민을 겨냥해 쏜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족과 시민들의 요구로 2016년 9월에 열린 국회 백남기 청문회와 10월 국정감사에서 무리한 물대포 사용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살수차 내 cctv와 현장 영상자료 분석 결과 물대포는 백남기 농민의 머리를 조준해 살수했다. 백남기 농민과 살수차의 거리는 7~8m에 불과했다. 경찰은 그가 쓰러진 것을 인지하고도 별도 구호조치를 하지 않았다. 지침상 직사살수를 할 경우 사람의 가슴 이하 부분을 겨냥해야 한다. 거리에 따라 물살세기에 차등을 두고 사용해야 한다. 부상자 발생 시 즉시 구호조치해야 한다.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도 이 부분은 경찰이 위법함을 지적했다.
경찰이 국회·법원의 제출명령을 거부하다 올해 6월 제출한 ‘청문감사보고서’도 경찰의 거짓을 드러냈다. 충남살수09호를 조종한 경찰관 2인
중 1인은 살수차 운용경험 없이 단 1차례의 교육만을 받고 투입됐다. 기계조작 방법도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다. 나머지 1명도 경험은 단 한 번뿐이었다. 이들은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후 그를 구하려던 집회참가자를 겨냥해 직사살수를 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을 지휘한 공아무개 경위도 무전으로 시위대가 많고 밧줄을 당기는 시위대 방향으로 살수할 것을 지시했다. 심지어 충남살수09호의 수압제어장치는 고장나 있었다.

3600명: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날, 강제 부검을 위해 병원에 투입한 경찰병력의 수
2016년 9월25일 오후 경찰병력이 병원을 봉쇄했다. 백남기 농민 사망 직후 경찰측은 시신 부검을 위한 영장을 청구했다. 사인이 불분명해 부검을 통해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족은 강하게 거부했다.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씨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들의 손이 아버지에게 다시 닿게 하고 싶지 않다”며 “저희 가족은 부검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경찰이 책임 회피를 위해 사인을 조작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환자의 발병 원인은 경찰 살수차의 수압, 수력으로 가해진 외상으로 인한 외상성 뇌출혈과 외상성 두개골절 때문이며, 당시 상태는 당일 촬영한 CT영상과 수술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17일간의 투병 과정으로 외상 부위는 수술적 치료 및 전신상태 악화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부검은 불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가족들이 부검을 원치 않고 있으며 이처럼 발병원인이 명백한 환자에게서 부검을 운운하는 것은 발병원인을 환자의 기저질환으로 몰아가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와 안전행정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도 법원에 “백남기 농민의 사인이 명백해 부검대상이 아니며 유가족이 원치 않는 정치적 목적의 부검은 부당하다”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후 경찰이 상황속보에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뇌출혈로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기록한 것이 드러났다. 사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부검을 주장한 것이다.
여론이 들끓었다. 시민들이 달려와 경찰과 대치했다. 장례식장을 지키며 밤을 샜다. 법원은 첫 영장을 기각했으나, 두 번째는 ‘유가족의 동의’를 조건으로 일부 승인했다. 이례적인 조건부 영장을 두고 정치적 부담을 느껴 유가족에 책임을 미뤘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시신탈취 사건 같은 과거 정권의 강제부검, 증거조작 사례가 재조명됐다. 경찰은 부검영장이 만료되는 10월25일까지 지속적으로 영장 강제집행을 시도했다. 사태는 여론의 비난 속에 10월28일 경찰측이 영장재청구를 포기하면서 일단락됐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지, 유족과 시민들이 장례식장에서 밤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장례식이 치러졌다. 백남기 농민은 11월6일 광주시 5.18 구묘역에 묻혔다.

9개월: 서울대병원이 백남기 농민 사인을 병사에서 외인사로 정정하는 데 걸린 시간
‘물대포에 의한 충격’이라는 명확한 사인을 불분명하게 만든 것은 서울대병원의 사망진단서였다. 서울대병원은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에 사망종류를 외인사(외부 요인으로 인한 사망)이 아닌 병사로 기재했다.4 대한의사협회 사망진단서 기재원칙상 외상의 합병증으로 질병이 발생해 사망한 경우는 외인사로 분류된다. 사고 당일 병원측이 내린 진단(외상성 경막하출혈)과 수술 기록(두개골이 골절되면서 뇌출혈이 매우 심하게 일어났다)과도 맞지 않는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것이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부검영장을 청구했다.
의료계 전반에서 비판이 일었다. 백남기 농민의 투병과정을 살피고 사망 당일 검시에 참석했던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검시 과정에서 후송 당일 서울대병원의 진단 내용과 어긋나는 소견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외상성 요인으로 발생한 급성경막하 출혈과 병사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 의대생들도 “고인의 죽음은 명백한 외인사”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더구나 병원측이 백남기 농민의 상병코드를 ‘외상성 경막하출혈‘로 기재해 보험급여를 청구해왔던점,백교수가백남기농민사망 직후 작성한 의무기록에 사인을 ‘외상성 경막하출혈’로 기재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비판은 확산됐다.
유족 측은 사인 정정을 요구하면서 백남기 농민의 사망신고를 미뤘다. 병원측은 사망진단서가 기재원칙을 어겼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진단서를 수정하지 않았다.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국정감사에서 “사망진단서와 진료는 적법하게 처리됐다”고 주장했다. 주치의인 백선하 교수는 “유족들이 적극적 치료를 원하지 않아 합병증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해 사망한 것이기에 병사로 표기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죽음의 책임을 유족에 돌린 셈이다. 그러나 병원 의무, 간호기록에는 강도 높은 연명치료 속에 백남기 농민의 몸이 계속해 악화되고 있던 점, 그럼에도 평소 백남기 농민의 소신에 따라 더는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가족들을 거듭 설득해 치료를 계속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있었다.
외압설이 제기됐다. 실제 경찰측이 사고 이후 매일 정보관들을 병원에 상주키시며 지속적으로 백남기 농민의 상태를 파악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측은 백씨의 시신이 영안실에 안치되기도 전에 백 교수에 대한 참고인조사를 벌였다. 이때 “급성신부전으로 인한 심장정지로 사망했다”는 백 교수의 말은 다음날 경찰청장이 부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명분으로 활용됐다. 서창석 병원장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 주치의 출신이라는 것도 의혹을 가중시켰다.
병원의 입장은 정권이 바뀐 뒤에야 달라졌다. 병원측은 올해 6월15일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를 ‘외인사’로 수정했다. 유족들은 6월26일 사망신고를 마쳤다.

1년10개월: 강신명 등 경찰을 상대로 한 유가족의 살인미수 고발에 검찰이 답하지 않고 있는 시간
백남기 농민 유족과 민변 변호인단은 2015년 11월18일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과 경찰 진압책임자 6명을 살인미수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나도록 검찰 수사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장 총괄지휘관이었던 구은수 당시 서울경찰청장 등 피고발인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으나 결론은 내지 않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한 늑장수사 관행이 반복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검찰의 늑장수사는 경찰이 사건 관련 자료를 숨기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경찰은 민중총궐기 집회 직후 바로 내부 감찰단을 꾸려 백남기 농민 사건과 관련한 진상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2016년 9월 국회 청문회에서 “조사보고서는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공개할 수 없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유족은 이외에도 경찰의 직사살수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소송, 물대포 직사살수행위의 위헌성을 묻는 헌법소원을 진행 중이다.

21만원: 박근혜가 이행하지 않은 쌀 80kg 수매가격
백남기 농민은 원래 2015년 11월 14일 보성 ‘자연지킴이 걷기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집회 전날 후배 농민이 민중총궐기에 같이 가자고 권했다. 당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탄 사람은 백남기 농민뿐이었다. “가자 11월 14일 서울로! 밥쌀용 수입저지!” 구호가 적힌 파란색 보성군농민회 조끼를 입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절박한 요구였다.
쌀 80 kg당 17만원인 쌀값을 21만원으로 올리겠다는 것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내건 대표적 농업공약이었다. 그러나 쌀값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폭락했다. 2013년 7월 쌀값은 17만6천원에서 2015년 14만 9천원으로 떨어졌다.
쌀이 남아돌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공약은 의도된 공수표와 다름없었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36만톤의 쌀이 과잉 공급됐다. 이중 1/4이 수입쌀이다. 한국이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른 농산물시장 개방에서 쌀 시장을 제외하는 대신, 매년 일정량의 쌀을 의무수입하기로 한 탓이다.
정부는 2005년 쌀시장 개방 유예기간을 2014년까지 연장하고, 대신 의무수입하는 쌀을 매년 늘리기로 했다. 국내 쌀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밥쌀도 수입하기로 했다. 농민들은 크게 반발하며 같은해 11월15일 농민대회를 열었다. 전용철(44)·홍덕표(68) 농민이 여기서 전경에 구타당한 뒤 사망했다. 경찰은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떠밀려 넘어지면서 머리에 받은 충격(전씨)과 경찰 방패에 뒷목 등을 가격당한 충격(홍씨)이 사망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져 비판에 휩싸였다.
2015년에 이르러 수입쌀 의무수입량은 40만 8700톤까지 늘었다. 90년대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정부는 같은해 쌀시장을 개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의무수입도 그대로 하기로 했다. 남아도는 쌀을 처리할 실효성 있는 정책은 없었다. 이 시기 한 농가가 쌀로 얻는 수입은 1년에 637만원이었다. 한 달에 53만원 꼴이다. 전체 농가의 45%가 쌀농사를 짓는다.
농민들의 비판이 이어지자 정부는 쌀값 21만원 보장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공약이 아니라고 했다. 농민들의 쌀값 보장 요구를 내건 민중총궐기에 경찰은 갑호비상명령을 발동했다. 대테러, 대재난 대응시 발동하는 비상명령이다. 그리고 여기서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를 맞았다. 쌀 농가를 살려달라고 외치다 경찰로 인해 사망한 농민은 이로써 세 명으로 늘었다.
올해 쌀값도 12만원대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쌀 공급과잉 해소대책은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해 산지 쌀값이 폭락했다는 이유로 농민들에게 우선 지급한 쌀값 일부를 토해내라고 해 농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1300kg: 백남기 농민이 남긴 마지막 밀
백남기 농민은 민중총궐기 집회 이틀 전 밀밭에 씨를 뿌렸다. 2016년 6월 돌아오지 못한 주인 대신 동료들이 밀을 거뒀다. 32가마(1300kg)가 나왔다. 평소엔 50~60가마의 밀을 거뒀다고 한다.
백남기 농민은 ‘보성군 우리밀 농민 1호’였다. 우리밀이 멸종 위기에 처한 1989년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밀가루 무상원조로 국내 밀시장은 수입밀이 장악하고 있었다. 1970년대 정부의 분식장려정책에 수입밀 의존도는 더욱 심해졌다. 정부는 1982년 밀 수입을 자유화하고, 1984년부터는 국산밀 수매를 중단했다. 밀농사 기반은 빠르게 붕괴했다. 1970년대 15% 수준이던 국내 밀 자급률은 1990년 0.05%까지 떨어졌다. 이때 백남기 농민은 전국을 돌며 토종 밀종자를 구했고 각 지역에 배포했다. 현재 한국의 밀 자급률은 1%다. 백남기 같은 농민들이 스스로 어렵사리 만들어낸 수치다.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밀 생산과 소비를 촉진할 구체적 정책도 없다. 최근 우리밀 농가들은 남아도는 밀 1만5천톤을 해소할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백남기 농민 유족과 동료들은 백남기 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백남기의 뜻이 우리밀과 함께 살아나기를 바란다. 그가
뿌린 마지막 밀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가 밀가루와 국수, 냉면 등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종자는 보성군농민회 등이 ‘백남기 밀’이라는 이름으로 보존, 보급할 방침이다. 주문은 누리집(baeknamki.kr), 전화(1588-6208), 전자우편(woorimil@hanmail.net)으로 할 수 있다. 밀 판매수익은 백남기 밀 보존 등의 기념사업에 쓰인다.
한편 2016년 11월 14일 시민사회단체들은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이날을 물대포 추방의 날로 제정했다. 국회에 살수차 사용을
금지하고 청와대 인근 집회를 허용하는 내용의 입법청원서도 제출했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경찰의 살수차 사용범위를 제한하는 내용의 ‘백남기법'(경찰관 직무집행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에 공감한다는 의견을 국회의장에 표명했다.
올해 9월7일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경찰개혁위원회는 집회시위 금지통고를 최소화하고, 살수차 배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경찰력 행사를 절제하는 내용의 집회시위자유보장권고안을 발표했다. 살수차 사용기준은 핵심 국가중요시설에 공격이 있을 때로 제한했다. 경찰차벽도 예외적인 경우에만 설치한다. 경찰의 채증도 대폭 제한하고 집회시위 신고절차는 간소화했다. 강제해산도 명백한 위험이 발생할 때만 이뤄지도록 했다. 경찰은 이를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0: 그러나 아무도 사과하지는 않았다
앞서 2005년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사망에 대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대국민사과를 하고 경찰청장은 자진사퇴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인 2015년 12월 민중총궐기 경비. 수사를 담당한 경찰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입장은 한 번도 표명하지 않았다.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백남기 농민에 대해 “경찰청장으로서의 사과는 못한다.”고 못박았다. 2016년 8월 끝내 사과 없이 퇴임했다. 같은해 9월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도 살수차 사용은 적법했고 개인을 겨냥한 직사살수를 하지 않았다고 거듭 말했다. 이를 뒤집는 증거가 제시되었지만 사과 대신 말을 바꿨다. “특정 상황에서는 개인을 조준할 수 있다”, “백씨는 밧줄을 당겼을 뿐이지만 그것도 공동의 폭력행위라 물대포 사용 요건을 충족한다”고 발언했다.
청문회 후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자 후임인 이철성 경찰청장은 유족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강제부검을 시도했다 실패했다.
핵심증거를 은폐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경찰은 검찰과 국회가 요구한 관련자료 제출을 거부해왔다. 경찰 내부 진상조사 내용이 담긴 청문감사보고서는 사건이 벌어진 지 2년 만인 올해 6월에야 법원에 제출됐다. 2016년 10월 국정감사에서는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당시 상황을 기록한 상황속보 기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해당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경찰 청문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살수차 운용요원들은 백남기 농민 사건을 두고 “잘못을 인정한다”, 직사살수 행위 등의 “위험성을 인정한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이들은 국회 청문회에서 얼굴 공개를 거부하고 가림막 뒤에서 “적법하게 운용했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지금까지도 사과를 표명한 사람은 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서울대병원이 진단서를 수정한 직후인 6월, 이철성 경찰청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백남기씨
사망 당시 살수차 운용, 안전장치와 운영요원 숙련도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청장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아무도 기소하지 않고 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는, 과실은 있는데 사과도 처벌은 없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백남기 농민이 운명한 지 1년이 지났다.

글. 윤성희, 백남기 투쟁본부